성균관대학교 웹진

인물포커스 | 성대사람들

안녕하세요. 저는 우리 학교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양희라고 합니다. 우리 학교에 온지 20년도 훌쩍 넘었네요. 91년에 부임하면서 그 무렵에 아동 학대 예방을 위한 인권 운동을 시작했어요. 2003년 부터는 유엔 아동 권리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습니다. 위원으로서 10년 정도 활동하다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위원장에 선출이 되었고, 2번 연임하기도 했어요. 2014년 부터는 유엔 미얀마 특별 보고관으로 선출 되어 벌써 3년간 활동을 하고 4년을 바라보고 있네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평범하지 않은 경험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저는 난민 생활을 한 적이 있어요. 어린시절, 정치활동을 하던 아버지께서 5·16쿠데타 이후에 정치적 이유로 미국으로 망명하시게 됐어요. 가족들도 1년 후에 아버지와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미국에서 국적 없는 사람으로 난민 생활을 하게 된거죠. 그때 돈이 없어 흑인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에서 생활하며, 흑인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에 다녔어요. 직접 소수자가 되어, 소수자들의 사회 안에서 생활한 것이 그들을 이해하는데 아주 큰 영향을 주었지요. 그들이 나를 받아줄 때, 이게 바로 '다양성을 인정하는 나라의 힘'이구나를 느끼기도 했어요. 우리나라도 저 스스로 소수자로서 생활하며 소수자들의 삶을 직접 느끼게 된 것이죠.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군사 독재 물러가라!'하는 피켓을 들고 백악관 앞에서 데모를 하기도 했어요. 그때가 바로 제 인권 운동의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당시에는 저를 가리켜 한국인으로서 가장 어린 인권 운동가라는 말도 했으니까 말이죠. 크면서는 세상에서 가장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이 장애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발달 장애인에 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장애 아동들이 학대를 받는 비율이 매우 높고, 학대 예방 일을 하다가 아동 인권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 지금은 아동학과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교수가 돼야 겠다는 생각은 학부생일때 부터 했던 것 같아요. 발달 장애인들을 위해 공부해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결심을 했고, 어떻게 하면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한 사람의 발달 장애인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교수가 되어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면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사회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혼자만의 지식으로 그치는 것보다는 우리나라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국제 사회에서 학문으로나, 다른 면으로나 경쟁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고 싶기도 했고요. 그런 생각으로 교수가 되어 인권 운동에 힘쓰고 있습니다.

유엔 인권 기구에 대해 생소하신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먼저 제가 활동하고 있는 유엔 아동 권리 위원회는 전세계 아동들의 인권 실태를 조사하고, 심의합니다. 또 아동권리 협약을 국가들이 얼마나 잘 이행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권고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특히 위원장을 맡게 되면서는 더 많은 나라를 방문하고 더 많은 상황들을 경험하게 되었어요. 저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동참해서 인권 협약을 잘 이행하기 위한 '일반 논평'이라는 권리조항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보통 일반인들이 차별이나 인권침해를 받았을 때, 국가 인권 위원회나 법원에 송사를 제출하는 등 불합리함을 당국에 알려야 해요. 그 후, 고등법원에 항소를 할 수도 있고 그래도 조치가 불합리하면 국제 인권 재판소와 같은 곳에 구제조치나 보상조치를 요청할 수 있어요. 이러한 국제 기구는 국가에 제재를 가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아동은 그 전까지는 이런 조치를 요구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어요. 제가 위원장이 되면서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어요.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위원장을 하며 아이들이 국제 기구에 개인적인 진정을 할 수 있는 국제 인권 협약이 유엔에서 채택될 수 있도록 큰 노력을 했습니다. 현재는 아동 스스로나 아동의 대리인이 국내 절차를 다 소진한 이후에는 국제 기구에 제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동들이 어른들의 소유물이나 수혜자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자라는 것이 인정받았다는 의미라서 이런 제도가 마련된 것 만으로도 매우 큰 의미가 있어요.

2014년부터 미얀마 인권 특별보고관으로 활동하면서 미얀마의 인권개선과 민주화에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많은 나라들 중에 왜 하필 미얀마인지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아동 권리 위원회 일을 10년 동안 하면서 5년이 주기인 미얀마 심의를 두 번 겪었어요. 그러면서 미얀마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우리나라와 미얀마의 역사가 유사한 점을 많이 가진다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미얀마도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어요.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군사 독재정권으로 얼마전까지 6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요. 미얀마는 옛날에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였는데, 군사독재와 잘못된 국가 경영, 부패, 그리고 천연자원을 둘러싼 내전으로 지금은 세계에서 제일 못 사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어요.

특히 로힝야족의 인권 탄압 문제가 심각해요. 로힝야족은 주로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 민족인데, 국민 대부분이 불교를 믿는 미얀마에서 큰 인권 탄압과 차별을 받고 있어요. 140~150만 명의 국적 없는 사람들이 난민촌에 모여 살고 있어요. 식수도 없고 흙탕물에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이 떠다니는 곳에서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며 미얀마 인권 문제가 굉장히 심각함을 느꼈어요. 거주의 이동과 교육의 자유도 없고 심지어 건강권까지 침해받으며 아이를 낳아도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어요. 이런 문제들을 지켜보며, 군사독재 시절을 겪고 나서 한강의 기적까지 이뤄낸 우리나라의 비슷한 경험을 토대로 자유 민주사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천으로 옮기게 된 것이지요.

미얀마에 일년에 두 번은 꼭 방문해서 아동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조사하고, 제네바의 인권 이사회, 그리고 유엔 총회에 보고하고 있어요. 저는 미얀마 정치 수용소에 있는 정치범, 사상범과도 접촉할 수 있어서 미얀마의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조사한다고 볼 수 있어요. 한국에 있으면서도 미얀마에 대한 뉴스는 꼭 챙겨보며 미얀마의 모든 일은 제 머릿속에 넣어놓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데에는 비행기 값 등 기본적인 비용 이외에는 지원을 받지 못해요. 활동비도 필요하고, 자료수집을 하는 데에도 많은 비용이 필요해요. 마침 평소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던 우리 학교 출신이신 류덕희 회장님께서 우리 대학교에 인권 증진을 위해 힘쓰는 교수가 있다고 하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셨다며 사비로 활동비를 지원 해주셨어요. 덕분에 상당히 많은 일들을 더 빠른 시간에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미얀마에서의 인권 보호 활동을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을 꼽자면 시간이 모자르는 것이에요. 미얀마에 가면 차로 6시간, 배로 6시간을 이동하는 것이 기본이에요. 넓은 영토에 인프라가 잘 되어 있지 않아 이동시간이 매우 오래걸려요.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서 산사태로 고립이 되기도 하고, 내전지역에 들어가면 지뢰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고요. 유엔 보조원과 수행 경호원이 있지만 다 각자의 할 일로 바빠서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에요. 유엔 일을 한다는 것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 수도 있지만, 많은 양의 자료를 짧은 시간 안에 소화시켜야 하는 것이 매우 힘든 점이에요. 테러범들이 신변을 위협하는 일도 있어요. 공항에 내리는 순간 죽여버리겠다는 메시지를 받기도 하지만, 이런 걱정 때문에 미얀마에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포기하는 순간 테러범들에게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수행 경호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 항상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인권 운동가로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일을 꼽자면 바로, 아이들이 국제 사회에 진정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든 것을 이뤄냈다는 점이지요. 아이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인권을 지킬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하는 것이 아동인권 신장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어렵고 고민 되는 점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답답함을 느낄 때입니다. 얼마 전 3살 짜리 어린 난민 아이가 바닷가에서 죽은 사진이 이슈가 된 적이 있었죠. 이런 일들을 보면 그 어린 아이들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점이 너무 답답한 것 같아요. 유엔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런 일들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도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고요.

교수로서 가장 보람된 일은 아무래도 학생들을 볼 때지요. 제가 환갑이라고 학생들이 제 사진들을 콜라주해서 가져 왔을 때나, 첫 해 부임해서 가르쳤던 학생들이 찾아올 때, 그 학생들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교수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때입니다. 가장 힘들 때도 힘들어 하는 학생들을 볼 때예요. 학생들이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시련을 겪을 때 저도 함께 힘들더라고요. 교수를 하며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제가 가르치던 학생 둘이 결혼을 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였어요. 인간의 무기력함을 느끼고, 교수가 이렇게나 무력한 존재였구나를 느끼며 많이 힘들었습니다.

앞으로는 학교에서 남은 시간은 학생들을 잘 키워 제자들이 아이들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모두가 아이들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제 꿈이에요.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목표가 끊임이 없지만, 일단 미얀마가 민주사회로 안정될 때까지 쉴 수 없을 것 같아요.

모든 학생들이 자기 스스로를 '가진 자'가 아니라 소수자라는 생각을 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을 대할때, 내가 대접 받고 싶은 만큼 대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새터민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적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좀 더 배려를 받고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들 때문에 내가 피해를 받고 있다거나, 내가 누릴 것을 뺏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안돼요. 입장을 바꿔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들의 잠재력을 믿으라는 말이에요. 여러분의 잠재력은 어디가 그 끝인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잠재력을 풍부하게 키워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항상 옵션을 열어두는 습관을 가져야겠죠. 저는 종교를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항상 준비 되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죠. 외국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취미 생활도 이것저것 다양하게 해보세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다양한 책도 읽고,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봉사활동은 꼭 해보라는 것이에요. 그러다보면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꽉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이지원 기자
이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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