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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읽기 | 캠퍼스컬쳐

개강이다. 옛 어른들이 그랬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고등학교 친구들은 아직 방학을 즐기고 있는 와중에 혼자만 맞이한 개강은 어딘가 모르게 가슴 아팠다. 너무 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볼을 스치는 가을이 오면서 마음은 더욱 싱숭생숭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공부하기 싫었다. 기자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어차피 공강인 이 시간,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무작정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갈까 생각했다. 버스는 학교 앞을 지나 창경궁을 지나갔다. 정했다. 오늘 하루는 서울 시내의 모든 궁궐의 풍경을 찍어보기로.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광화문 광장. 서울시청에서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보이는 충무공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뒤로 보이는 광화문이 경복궁의 정문이다. 경복궁은 흔히 조선의 법궁이라고 한다. 법궁은 임금이 사는 궁궐로 정궁이라고도 한다. 가장 먼저 지어진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지기 전까지 임금이 거주하던 공간이다. 경복궁을 비롯해 궁궐은 크게 세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이 공적인 행사와 업무를 처리하던 외전. 왕족의 침실이 있는 내전. 그리고 왕족들의 휴식공간인 후원이다. 각 부분은 저마다 대표 건물이 있다. 외전은 경복궁의 대표 건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근정전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흔히 영화에서 왕이 높은 단상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고 신하들이 그 안에서 정렬해 보고하는 장면은 근정전이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대에 따라 배경이 되는 궁궐이 다르니 그 건물 역시 근정전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터이다.

근정전에서 나와 살짝 옆으로 가면 경회루가 보인다. 경회루는 근정전과 더불어 경복궁의 대표적인 건물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장소다. 우리에겐 만 원권 지폐 뒷면에 그려진 건물로 친숙한 곳으로 외교적 행사가 열렸다. 경회루는 이층으로 지어졌는데 아래의 기둥들은 음양이론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둥들을 잘 살펴보면 가장 바깥쪽 기둥은 사각형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그 안쪽의 기둥들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음양이론에 따르면 사각형은 땅을 상징하고 둥근 모양은 하늘을 상징한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기둥처럼 세세한 부분에도 신경 써서 건물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회루의 지붕은 경복궁의 그 어떤 건물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큰 크기를 자랑한다. 그 끄트머리에는 검은색 조각상이 줄지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검은색 조각상은 잡상이라고 하는데 옛날 사람들은 잡상이 하늘에서 오는 악귀나 악령으로부터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이때문에 잡상의 수는 그 건물의 중요도를 나타내기도 했다. 재밌는 사실은 왕의 침실이나 개인적 사무실보다 경회루의 잡상 수가 더 많다는 점이다. 옛 조상들이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의 대외관계를 중시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건국 초기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다. 그러나 경복궁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불타 없어졌다. 물론 다른 궁궐들 역시 불탔지만 전쟁이 끝나고 복원된 것은 법궁 경복궁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창덕궁이었다. 풍수지리적인 이유도 있고 규모가 큰 경복궁을 먼저 복원하기엔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창덕궁은 이궁, 혹은 별궁의 이름으로 불리며 주로 요양을 목적으로 설계되었으나 선조에 의해 복원되면서 법궁의 역할까지 행하게 된다.

창덕궁의 가장 큰 특징은 후원이다. 창덕궁은 가장 큰 후원의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많이 좋아했다는 기록도 있다. 휴식을 강조한 궁궐답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 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실제로 광화문부터 주요 건물들이 한 직선상에 늘어선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정문(돈화문)이 궁 전체의 왼쪽 끝에 있다. 돈화문을 거쳐 가장 중심 건물인 인정전으로 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우회전’ 한 번 하고 ‘사다리꼴’을 한 마당을 지난 후에야 건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옛 조상들이 경복궁을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직사각형의 반듯한 마당을 만들 수 있었을 터이다. 또한 질서정연하게 한 축을 따라 중요 건물을 배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해서 최대한 자연의 풍경을 살리는 방향으로 설계했다. 이때문에 서울의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 내용을 들어보면 날씨 좋은 날에 연인과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데이트를 즐기고 싶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커플은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이라 불리는 골목 끝자락에는 원래 서울 지방 가정법원이 있었다. 그래서 돌담길이 데이트 코스로 자리 잡기 이전까진 관계에 문제가 있는 커플들이 법원을 가기 위해 걷는 길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최근에는 영국대사관에 의해 막혀있던 돌담길 일부가 서울시에 반환되면서 더 긴 돌담길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커플들에게 좋은 추억과 나쁜 기억을 주었듯이 조선에게 덕수궁은 희망과 상처가 공존했던 장소다. 덕수궁의 원래 명칭은 경운궁이다. 세조의 손자인 월산대군의 사저로 쓰이다가 임진왜란 이후 궁궐이 채 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조가 행궁으로써 사용하면서 궁궐의 자리에 놓이게 됐다. 창덕궁이 지어지면서 자주 쓰이지 않게 됐다가 고종이 즉위하면서 역사 속에서 이름을 드러내게 됐다. 당시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덕수궁에 기거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키우고자 노력했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무너져 내렸던 덕수궁 내부의 건물들을 새로 들였다. 덕수궁은 고종에게 희망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고종에게서 희망을 앗아갔다. 외세의 침략야욕 속에서 을사조약이 덕수궁에서 강제로 체결되면서 우리나라의 상처의 역사가 시작되게 된다. 덕수궁 안에 있는 건물들의 스토리를 찾아보는 것도 궁궐 나들이를 즐길 방법이다.

성균관대학교 명륜캠퍼스에 다니는 학우들이라면 한 번씩 지나쳤을 궁궐이 창경궁이다. 흔히 올레 사거리라고 부르는 곳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떨어진 장소에 있다. 그래서 공강 시간에 친구들과 나들이 가는 학우들이 많다. 창경궁 역시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30년(1830년)의 화재를 겪으면서 소실되고 복원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순종이 즉위하고 순종의 거처가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지면서 일제가 창경궁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하에 일제는 창경궁의 건물들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개원한다. 그 뒤 1911년에는 궁궐의 이름 자체를 창경원으로 바꾸어 궁궐의 격과 위상을 낮추기 시작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창경궁은 1984년 복원되기 시작했다. 창경궁에 있던 동물원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됐다. 일본인이 심어놓은 벚나무 역시 뽑아냈다. 1986년에는 창경궁의 중요건물인 명정전의 회랑과 문정전 일대를 복원했다. 명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처럼 외전의 중심 건물로 주요 행사가 치러지던 장소다. 다만 다른 궁궐에 비해 명정전은 단층구조로 조금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초기 창경궁이 왕실의 어른들을 모시기 위한 공간으로 설계 및 확장 수리되면서 외전보단 내전에 중심을 두고 건설했기 때문이다. 문정전은 왕의 개인 사무실 같은 공간으로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선정전과 같은 역할을 한 건물이다. 창경궁의 외전 영역에서 유일하게 남쪽을 바라보도록 건축됐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명정전이 동향인데 문정전 역시 동향으로 건설하면 한 궁궐에 정전이 둘이 돼 격식에 맞지 않는 이유라고 한다. 창경궁은 이외에도 후원이 넓어 가을 나들이로는 가장 적격의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

학우들에게 경희궁이라는 이름은 생소하다. 경복궁이나 덕수궁, 창경궁과 창덕궁까지는 많이 들어보거나 길을 가면서 많이 접해봤을 법하지만 경희궁은 그렇지 않다. 경희궁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있으며 덕수궁과 경복궁의 중간지점 정도에 자리 잡고 있다. 정확하게는 서울역사박물관 옆에 있다. 다른 궁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건축이 시작된 경희궁은 1617년에 공사가 시작됐다. 그래도 다른 궁궐들 역시 한차례 지어졌다가 임진왜란 등의 사건으로 소실된 역사가 있어 건물의 역사 자체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원래는 왕족의 저택으로 쓰이던 장소였지만 풍수지리적으로 왕의 기운이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이 그 자리를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창경궁과 마찬가지로 순조 때 화제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중건되었다. 이후 경희궁은 일제 강점기 때 궁궐의 각 건물들이 해체되어 서로 분리되는 아픔을 겪었다. 예를 들어 경희궁의 숭정전은 1926년 일본인에 의해 지금의 동국대학교 구내로 이전되고 흥화문은 장충동의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된 역사가 있다. 지금은 1988년에 진행된 경희궁 복원작업에 의해 제자리를 찾거나 새로 건물을 올려 원래 경희궁의 모습을 되찾았다. 최근 데이트 코스로 떠오르고 있는 경희궁은 아담한 크기와 함께 산책하기 좋은 고궁으로 손꼽히고 있다. 학우 여러분들도 선선한 가을 날씨 아래 경희궁을 산책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노한비 기자
신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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