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학교 웹진

독자투고

글 : 김나현 정치외교학과(14)

이런 림보, 들어봤어?

2010년 7월 21일에 개봉한 영화 ‘인셉션’은 드림머신을 통해 타인의 꿈 속 생각을 훔치거나 생각을 심는 행위가 가능한 세상이다. 이 영화는 인간의 ‘꿈’을 다루기 때문에, 얕은 꿈과 사람의 깊은 무의식까지 여러 단계로 나눠 세계관을 그린다. 그 중 림보(Limbo)란 공간은 인간의 무의식이 가장 깊고 정신세계와 완전히 대척되는 공간으로, 꿈속에 침투한 요원이 타인의 꿈속에서 방향성을 잃거나 여타의 이유로 꿈에서 깨지 못할 때 떨어지는 공간이다.

인간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림보는 그러나, 현실과 꿈의 이중성을 지닌다. 이곳은 무의식 속 영감이 무엇이든지 ‘창조’될 수 있는 공간으로 비현실적이나, 림보에 떨어진 사람들은 헤어나오기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리적 감각이 현실의 그것과 똑같아 매우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볼 수 있는 ‘현실세계’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꿈’에 불과한 이 곳. 예술연출 분야에서 경계가 없는 모호한 배경을 뜻하기도 하는 림보는 가톨릭의 신학 개념 중 하나인 ‘고성소(古聖所)’에서 유래했다. 고성소는 회화로도 자주 그려졌지만,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의 작품 속에서도 등장한다. 그의 벗 베르길리우스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이곳에 갇혀있었다면 흥미가 돋워지는가? 천국, 연옥 그리고 지옥으로 분리되는 세계에서 그 어느 곳도 속해있지 않은 중간지대인 ‘고성소(Limbo)’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지, 어떤 이가 가는 곳인지 그리고 고성소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중세에 그려진 그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고성소(古聖所)란 무엇인가?

'Descent of Christ to Limbo' by Andrea Bonaiuti da Firenze (1368)

고성소(古聖所)란? 라틴어로 ‘변방’ ‘Boundary’를 뜻하는 Limbus이며 영어단어인 림보(Limbo)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Edge of Hell로서 ‘지옥’의 변방에 위치한다. 즉 고성소의 개념은 지하 세계(Nether World) 곧 저승(그-Hades, 히-Sheol)에 해당하며 산 자가 아닌 이미 죽은 영(靈)들이 가는 곳이다. 천국에서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느님을 직접 보는 천국의 행복한 상태)을 누릴 자격이 없으나 지옥으로 갈 만큼 죄를 짓지 않거나 못한 자들이 모인 중간지대다. 림보는 중간지대라는 점에서 ‘연옥(煉獄 - Purgatory)’과 비슷하나, 림보는 연옥과 달리 신약 이후 정식으로 인정된 교리가 아닌 ‘신학적 가설’이며 이곳에 들어가는 영(靈)은 단 두 부류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고성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 성조(聖祖)들의 림보(Limbus Patrum)

- 유아(幼兒)들의 림보(Limbus Infantum)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미처’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며, 대부분의 망자(亡者)가 간다는 연옥에서 죄를 단련하는 벌을 받지도 않는다.

그는 육신으로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으니
(베드로전서 3장 18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베드로전서 3장 19절)

림보의 개념이 제시되는 곳은 신약성서 중 하나인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 부활하기 전 4일 동안 그의 영이 지옥(陰府)을 방문하여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던 구약성경의 선조들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이 ‘지옥’을 뜻하는 원문은 Hell이 아닌 Limbus로 고성소의 개념이다. 이 지옥강하(陰府降下)는 실제로 예수가 지옥을 내려간 사실을 서술한 것인가에 대해 중세 신학자들 간 해석이 갈릴 정도로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이 장면은 많은 화가들에 의해서 그려져 내려왔다.

고성소에 당도한 예수와 성조(聖祖)들의 모습

‘고성소에 내리신 예수’를 그린 많은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서술특징을 지닌다.

- 문을 부수고 들어온 예수

- 예수의 발아래 짓밟힌 악마

- 무리의 선두에 선 노인 (백발과 흰 수염이 길게 늘어짐)

- 여자 혹은 머리에 왕관을 쓴 자가 존재

Harrowing of Hell

그림 속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사망해 미처 은총을 입지 못한 사람들이다. 공통으로 등장하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바로 ‘아담’이다. 그 옆에 종종 등장하는 여자는 원죄를 만든 ‘이브’이며 왕관을 쓴 채 무리에 섞여있는 사람은 다윗 혹은 솔로몬 왕으로 해석된다.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그리고 이탈리아의 성현 알리기에리 단테가 쓴 『신곡』에서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를 비롯한 그리스 성현들도 림보에서 구원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시간의 길이는 영겁에 가깝지만 구원이 이뤄지는 순간이 있기 때문에 림보는 '임시'적인 공간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함으로써 구원받고 림보는 임시적 공간의 역할을 다한다.

성현들이 구원되고 난 후 남은 림보는 Limbus Infantum. 유아들의 고성소다. 이들이 연옥에 가지 못하고 림보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원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죄’를 씻어줄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죄를 정화해줄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영아들이 지옥에 가야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토머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학자들은 이들이 가는 림보가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 그러나 이 신학적 가설은 가톨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개념이 아니다. 사료들을 살펴봐도 Harrowing of Hell을 그린 대부분의 회화들은 베드로전서에 나온 선조들의 림보를 그린 작품이 많으며 유아들의 림보를 그린 작품은 많지 않다. 그만큼 논쟁이 많았던 개념임이 틀림없다. 현대까지 미처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아이들에 대해 유아고성소를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격론이 오고가지만 여전히 아기들이 구원을 받는 방법은 여전히 단 한 가지 ‘세례’ 뿐이다.

A. 아담과 이브는 천국으로 갔다! - 회화 속 ‘사랑’의 메시지

‘고성소에 내리신 예수’가 가진 큰 의미는 바로 원 · 본죄를 지은 자들도 감싸 안아 구원을 내리는 ‘사랑’의 교리다.

‘Christ in Limbo’

by Lucas Cranach the Elder (1530)

‘고성소에 내리신 예수’가 가진 큰 의미는 바로 원 · 본죄를 지은 자들도 감싸 안아 구원을 내리는 ‘사랑’이다. 성조(聖祖)들의 림보에서 예수가 내민 구원의 손을 잡은 자들이 ‘원죄’를 만든 아담과 이브기에 더 실감난다. 보통 인간은 선천적 죄인 ‘원죄’를 세례를 통해 씻으며, 삶을 살아가며 짓는 ‘본죄’는 죽을 때 ‘연옥’에서 심판받는다. 하지만 림보 속 성현들은 연옥에 가지 않았다. 그 ‘왜?’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이들은 우선 환경적으로 예수의 은총을 박탈당하여 다른 이들과 같은 심판을 받기엔 비난가능성이 낮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 죽었기 때문에 ‘원죄’와 ‘본죄’를 지음에도 그 책임이 조각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 그리고 ‘구원자 예수’가 자신에게 올 날을 기다리며 지옥의 변방 ‘림보’에서 영겁의 시간 동안 그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점이 비난가능성을 조각시키지 않을까에 대한 필자의 의견이다.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구문화권에서 그리스로마신화와 더불어 가장 뿌리 깊게 자리한 문화적 코드는 단연 ‘성서’다. 혹자는 예수와 전혀 연분이 없던 고대 그리스의 성현들까지 종교적 세력에 녹이려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징을 통해 기독교라는 종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퍽 단순하고 명료하다.

전 세계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이 종교를 통해서 ‘삶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란? 고대 구약성서에 나왔던 죄 지은 인물인 아담과 이브를 가장 선두에 배치하여 이들이 가장 완성된 형태의 ‘사랑의 구원’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고성소-림보의 개념이 등장해 성현들이 연옥에 가지 않은 건 교인들을 향한 효과적인 구원의 메시지로 작용할 수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천국도 지옥도 연옥도 아닌 모호한 중간지대인 ‘림보’. 끈을 묶어 몸을 낮추는 곡예만 떠올렸던 이미지는 생소한 신학개념과 연결돼 낯선 연상관계를 연출한다. 고대 기독교의 치열한 교리연구와 포교를 위해 산출된 개념이, 어느새 인셉션같이 창작된 작품 속에서 차용되거나 직접 ‘고성소’ 개념을 차용해 만든 게임 등 알게 모르게 21세기 속에서 쓰이고 있다는 건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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